“혼자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오래된 질문 다시 말하기





안소연





1. 지각과 인식을 가로지르는 조각적 형태들



김인배의 작업은 조각적이다. 그것을 “조각”이라 말하지 않고 “조각적”이라 함으로써, 나는 그의 작업에 담긴 몇 가지 중요한 함의를 살피려 한다.

김인배는 주로 인체 형상 및 그것의 변형을 조각의 형태로 제시하거나 재료의 물성을 특정 사물의 구조 혹은 기하학적 형식 혹은 추상적인 형태로 입체화 하는 특징을 보여왔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작업 맥락에서 최종 결과물로의 완성을 나타내기 보다는 일종의 방법적 도구이거나 어떠한 과정을 추려내는 사건의 단서로서 기능한다는 것이 좀 더 중요한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의 작업은 형태 상 당연히 조각으로 결론 내려지게 마련인 물리적 특성이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그는 되레 그것이 적어도 조각으로 “보이게 되는” 지각의 조건과 인식의 과정을 신중히 환기시킨다. 이때 그는 원인과 결과로 점철되는 조각적 인과 관계에 자연스럽게 균열을 냄과 동시에 재해석 및 재배열의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조각적 감각과 사유를 한층 더 강화/완화시키기도 한다. 그가 시각적으로 견고하게 완성시켜 왔던 다수의 조각 형태들은 (그의 직접적인 의도와는 상관 없이) 스스로를 증명할 유연한 조각적 조건과 과정에 대해 환기시키려는 충동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련의 매체를 다루는데 있어서, 그는 대개 조각적 조건과 과정에 대한 사유와 인식을 매개하여 최종적으로는 완결된 조각의 형태로 존재하게 하면서도, 직관적인 현상으로 단번에 알아차릴 수 없는 작업 자체의 내적 절차들에 자신의 몸과 행위를 긴밀하게 개입시켜 어떤 형태의 “기원”과 관련된 내부의 경험을 활성화/동기화 시킨다. 그러한 내적 절차들의 내밀한 층위 역시 조각적 방법론이 가져온 고유한 특징이지 않겠는가. (쉽게는, 돌이나 나무에서 어떤 형상을 깎아내거나 주형에서 청동으로 주물을 떠내는 것처럼 말이다.)

가장 최근의 개인전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페리지갤러리, 2020)에서 그러한 정황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었는데, 이때 그가 첫 개인전 ⟪차원의 경계에 서라⟫(갤러리스케이프, 2006)부터 지속해 온 것으로 형태에 관한 지각과 인식의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꾸렸던 특유의 서사적 공간 구성 또한 크게 부각됐다. 시간과 공간/거리의 문제 말이다. 이를테면, 그는 인스톨레이션의 극적 논리가 단지 견고하게 고정된 조각의 형태들을 종합적으로 지각하는데만 기여하도록 두지 않고, 오히려 각각의 분리되어 있는 형태들 간 드러나지 않은 관계들을 구조화 하는 일련의 체스 판처럼 다룬 셈이다. 그래서 중요하게 된 것은, 그가 그 결과물에 대한 누군가의/익명의 신체 지각을 통해 형태 안에 봉인되어 이미 성취된 것으로 판명 난 숱한 조건과 의심과 선택들 앞으로 일체의 감각을 되돌려 놓아 인식의 (전복) 가능성을 다시 유심히 엿보게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점‧선‧면을 제거하라⟫(아라리오갤러리, 2014)에 대한 오래된 기억을 다시 떠올리며, 거기서 적당한 단서들을 찾아내 위의 정황에 대해 증명해 줄만한 임의의 것들을 가늠해 보는 게 낫겠다. ⟪점‧선‧면을 제거하라⟫는 김인배의 다섯 번째 개인전으로, ⟪차원의 경계에 서라⟫, ⟪진심으로 이동하라⟫(아라리오갤러리, 2007), ⟪요동치는 정각에 만나요⟫(두산갤러리/뉴욕, 2010)와 같은 앞선 개인전의 제목에서 보이는 것처럼, 어떤 행위의 실천을 문장으로 나타냈다. 시간의 순차에 따라, “점‧선‧면을 제거하라”는 것은 점과 선과 면의 “경계에 서서” 그것들을 진지하게 성찰함으로써 다른 곳/것으로 “이동시켜” 놓을 것을 요청함으로써 그의 서사적 시공 안에 담긴 세계관을 증폭시켜 확장한 버전으로 여길 만하다.

김인배는, 일련의 시지각적 세계관을 스스로 구축하려는 사람처럼, 지각과 인식을 가로지르는 조각적 형태를 (조각적 결말과는 무관해 보이는) 하나의 수행적 방법으로 다루곤 했다. (이때의 수행은 작가-작품-관객 사이를 매개 혹은 단절시킨다.) ⟪점‧선‧면을 제거하라⟫에서, 그는 받침대 위에 올린 기념비적인 조각의 형태들을 몇 개의 중심축으로 삼아 몇 광년 떨어진 우주 잔해의 궤도를 이어 그리기라도 하듯 공간 안에 각각의 형상을 공존/분리하기 위한 어떤 관계들을 지어냈다. 특히 인간 형상에 주목한 일체의 입체적인 조각 형태들은 그 (인체와의) 닮음을 전제로 한 지각의 토대 위에서 (기하학적) 다름의 경계 또한 선명하게 보여주지만, 사실 그는 이 상이한 것들이 (점, 선, 면 등의 제 정체성을 지운 채) “동일함”으로 공존하기 위해서 시공간의 차원을 흔들어 어지럽히려는 시도를 이미 보여준 바 있다. 요컨대, 밤하늘에서 흰 점으로 목격되는 별들이 몇 광년 떨어진 시공간에서 다른 크기, 다른 질감, 다른 색채, 다른 모양의 덩어리로 존재할 터인데, 그렇듯 다른 시공간에 의해 재편되는 지각과 인식의 변화무쌍한 차원이랄까, 김인배는 그가 말한 “차원의 경계”가 지닌 가상의 경험을 제 몸의 현상적 경험으로 나타낼 형태들을 만든다.



2. 조각적 관계에 대한 물음


그의 작업은 조각적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업을 조각이라고 쉽게 말하지는 않는다. 흔한 조각적 수사를 형태 보다 앞서 말하지도 않는다. 작업을 매개하는 메시지로 진심, 사랑, 기억 같은 추상적인 언어를 다루거나, -하라/-하기 같은 동작과 행위를 그는 종종 나타낸다. 그에 더해, 그가 했던 “혼자 잘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물음은 “무엇을”에 대해 반문하게 하는 불완전한 문장인데, 나는 이 질문이 그의 입장을 손색 없이 드러내주는 가설처럼 보여 모든 작업의 결과에 대입해 보려는 충동을 자주 겪는다.

<혼자 잘 할 수 있겠습니까?>(2007)는, 전시장에 흰 가벽을 세우고 위쪽 모서리에 거의 닿을 만한 높이에 한 점을 꼭지점으로 정해 큰 원뿔의 형태를 가시화 시킨 작업이었다. 그의 두번째 개인전 ⟪진심으로 이동하라⟫에서 보여준 이 작업은, 당시 그가 집중했던 “차원”과 “경계”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해 본격적으로 그것으로부터의 (상호) 이동과 공존의 현상적 경험을 망상하며 실험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김인배는 누구나 원뿔의 모양을 지각하도록 했는데, 벽의 높이 만큼을 거의 차지하고 있는 길이의 금속 “선”은 원뿔의 꼭지점으로부터 일련의 진자 운동을 하게끔 되어 있었고, 그 움직임과 (꼭) 닮은 원뿔 형태의 소묘가 흰 벽에 연필로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원뿔의 양쪽 모선을 왕복하며 움직이는 금속의 선재는 임의의 한 점에서 무한히 뻗어 나온 무명의 직선이자 원뿔의 옆면을 구축하여 어디에도 없던 밑면의 원까지 출현시킬 만한 가상의 “힘”을 지닌 물리적 존재다. 이때, 김인배는 드로잉과 조각, 간단히 말해, 2차원과 3차원의 경계를 혼용하되 좀 더 조각적 인식의 차원에서 관계를 극대화 한다는 인상을 준다. 내가 볼 때, <혼자 잘 할 수 있겠습니까?>에서 핵심은 선의 (실제적인) 움직임이며, 그 변화의 양상을 나타내는 움직임/이동이 일시적으로 지각을 촉발시키는 형상의 현전을 가능케 함으로써 닮음과 다름의 연쇄 작용이 끝없이 진행된다. 마치 뒤샹(Marcel Duchamp)의 <3 Standard Stoppages 세 가지 표준 정지기>(1913-1914)와 <Network of Stoppages 정지기의 네트워크>(1914)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떠올리게 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혼자 잘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물음은 다의적으로 확대될 수 있다. 먼저는, 드로잉과 (조각적 물질이라 할 수 있는) 사물 각각의 차원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보다 편중된 시각으로는, 저 포물선을 그리며 끝없이 이동하여 허공에 선명한 윤곽을 그려내고 있는 선재의 가능한 역량에 대해 확신하면서도 의심하는 작가의 속내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쨌든 차원의 문제다. 거기서 더 나아가 보면, “혼자”라는 것은 시공간에서의 단절을 말하는 것으로, 결국 흰 가벽 안에 중첩된 드로잉과 사물의 상태가 함의하는 “현전”의 문제로서, 원뿔의 입체 모형을 모사한 평면 데생과 그것의 재현된 형태를 움직임으로 또 다시 모사함으로써 사물이 획득하게 된 삼차원적 공간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다. 이때도 주목을 끄는 것은 실제 움직임을 수행하는 금속 선에 있는데, 그것의 실체가 과연 무엇일까? 앞에서 한번 언급했던 것처럼, 작가-작품-관객 사이를 매개 혹은 단절시키는 수행적인 오브제로, 모두의 (삼차원적) 실제 공간에서 실제 움직임을 수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소 비약적인 상상력을 덧붙인다면, 그것은 마치 소조 심봉에 각목과 노끈을 써서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형태의 가장자리 윤곽을 가늠하면서 축을 결정하는 행위와 비슷하다. 그 (조각적) 과정과 (조각적) 결과에서 경험되는 지각과 인식의 행위와도 관련 지어 볼 수 있겠다.

한편, 같은 전시에서 소개된 <델러 혼 데이니 Deller hon Dainy>(2007)나 ⟪점‧선‧면을 제거하라⟫에서 비슷한 구조로 제작한 <무거운 빛은 가볍다-왕관, 폐허, 기둥>(2014) 연작은, <혼자 잘 할 수 있겠습니까>의 실전편이라 말할 수 있으려나. <델러 혼 데이니>는 같은 주형에서 주물 뜬 세 개의 두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체 조각에 있어서 극단적인 생략과 강조, 그로 인한 유사와 대비, 정면성과 입체성 등 조각적 논점을 분명하게 아우른다. 게다가, 원기둥의 받침대에서 빠져나온 듯한 부동의 목선과 생략된 얼굴의 양감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의 추상 조각이 가졌던 유기적 관계를 떠올리게 하면서 조형의 논리를 추상화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구체적 대상 및 추상적 사유에 대한 “모각”에서 비롯된 조각적 관계에 대한 여러 물음은 <2의 모각 Things modeled on 2>(2018) 등과 같은 작업으로 조각적 행위에 대해 환기시키며 진행되어 왔다. <무거운 빛은 가볍다>처럼 주형을 계속 변형시키면서 형태의 닮음과 다름, 형태의 기원과 이동 등에 대해 질문하는 조형적 시도도 있었다.

<건드리지 않은 면 Untouched side>(2019)은 초기부터 그가 제기했던 차원의 경계에 대한 문제와 점, 선, 면을 제거했을 때 출현하게 되는 조각적 실체에 대해 흥미로운 가능성을 시사한다. 썰어 놓은 연근의 단면을 낱낱으로 스캔하여 마주하는 두 개의 같은 단면의 일시적 중첩에 의해 그것을 내부의 연속적 물질로 갖게 될 조각적 형상을 수직으로 일으켜 세운 그의 시도는, 결국 그 낱낱의 평평한 단면들은 전혀 모를 조각적 내막을 촉발시킨 셈이다. 이때, 연근의 단면들을 이어 붙여 수직으로 일으켜 “세운” 행위, 차원의 경계에 “서는” 행위와 점, 선, 면을 “제거하는” 행위, 그것은 모두 일련의 조각적 관계에 대해 질문하는 작가 자신의 몫으로, “혼자 잘 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다시 가져와 본다면, 이는 지각과 인식을 가로지르며 형태의 논리를 전복하는 작가의 역할 플레이를 관통한다.



3. 소조적 감각에 따른 형태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에서 환기시킨 감각 또한 매우 조각적이다. 이를테면, ⟪요동치는 정각에 만나요⟫와 <뒷모습>(2019)에서 강조됐던 선재의 물성과 조형적 효과를 아우르면서, <2의 모각>이나 <개수>(2017)에서 다루었던 형태의 수량과 관련한 숫자 세기의 함의를 재조명하였고, <무거운 빛은 가볍다>와 같이 형태의 기원 혹은 출처에 관한 시공간의 교차를 도모하여, 전반적으로는 일련의 모든 정황들이 매우 “소조적 감각”에 따른 형태를 환기시키는 것으로 나는 보았다. 아주 오래 전에 허버트 리드(Herbert Read)가 회화적 사고에 물들어 있던 현대미술의 조형 감각으로부터 조각적 사고를 분리시켜 보고자 쓴 The Art of Sculpture (1954)[※번역서: 『조각이란 무엇인가』(1984)]에서 “소조의 과학”이라 말했던 것과 비슷하다. 형태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심봉으로부터 조각의 표면에 이르는 거리/공간의 감각, 형태의 정면성을 보유하고 있는 움직이는/이동하는 윤곽선, 실제 공간 속에 완전한 입체물을 구현시키기 위해 일반적인 시지각을 무화시키는 특수한 감각에 대해, 그리고 촉감 및 질감과 중량감 등에 대한 종합적 감각에 대해 그는 언급했는데, 이는 김인배의 작업을 견인하고 있는 그의 비밀스러운 세계관을 엿보는데 있어 중요한 조각적 참조점을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인배의 작업은 소조적 감각에 따른 시지각적 세계관의 전복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외연을 넓힌다면 조각적 감각이라 할 수도 있을 테다. “조각적 조각”의 수사를 적용해 보면, 그의 실천에 대해서는 조각적 방법론에 대한 시지각적 재해석이라 할 수도 있을 테고, 조각적 보기의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조각의 삼차원성을 오히려 전복해 보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련의 시도들이 목적이기 보다는 과정 중의 경험에 있는 것으로, 그는 이것에 대해 굳이 조각적 시도라 말하지 않고 “나”와 “형태” 혹은 “형태”와 “형태” 사이의 관계라 말한다.















©2024 Inbai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