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 시점





(김성우 / 독립큐레이터,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디렉터)




무엇을 볼 것인가. 정확하게는 무엇을 감각할 것인가 라고도 할 수 있는 이것은 인식에서 자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김인배의 작업은 견고한 조형적 형상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향하는 시선이 표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조각은 공간 안에 존재하는 방식을 통해 초점을 표피적 이미지 너머로 확장하거나, 형상의 내부로 연장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관측한 결과는 역설적으로 아직 그 무엇도 되지 않은 상태에 가깝다. 즉, 무엇이 되어 있는 고정적 상태로서의 조각이 아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과정의 존재로서 시선을 욕망한다.



초창기 김인배는 ‘차원’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고(<<차원의 경계에 서라>>, 갤러리 스케이프, 2006 ) 고정된 관점을 뒤틀고 인식의 자유로운 전환을 시도한다. 작가에게 차원이란 일종의 인식을 경계 짓는 규칙과 조건이며, 그는 이 체계를 구성하는 경계면을 조각과 드로잉을 통해 해체하고 이어낸다. 매체적 차원에서 그의 작품은 조각이면서도 드로잉의 평면적 성격을 동시에 내재한다. 일반적으로 작업은 드로잉에서 출발해 완성된 조형으로 나아가지만, 그의 작업은 평면과 입체의 관계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면을 의식하듯 포즈를 취한 조각 <수영 잘하고 싶은 여자>(2006)는 뒤에 선 벽면의 납작한 연필 드로잉과 연결되(어야만 하)는데, 관찰자의 특정 시점에 도달해서야 조각난 신체는 온전한 형상을 획득하게 된다. 또한 벽면에 튀어나온 선반은 아래로 이어지는 드로잉-연장된 면과 그림자-을 통해 공간적 환영을 창출한다 (<상자>, 2006). 심지어 입체적 관점에서 측면이라는 개념 다음에 당연히 마주해야 할 정면과 뒷면은 그 기대를 저버린 채 끊임없이 측면만을 이어냄으로 시선은 한 면에 정착하지 못하고 형상의 구조를 따라 하염없이 맴돌게 될 뿐이다 (<지리디슨 밤비니>, 2006). 그의 작업에서 평면과 입체는 분리된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 간의 적극적인 충돌과 조화가 빚어낸 관계망 안에서야 비로소 시공간적 존재감을 취득하게 된다. 그에게 2D와 3D의 관계는 물리적 차이에 초점을 맞춘 축소와 확장의 가능성 문제가 아닌, 그것을 관측하는 이의 위치값이 더해진 통합된 차원의 시공간적 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서 평면과 입체를 연상 관계에 놓으므로 달성했던 시점의 전환은 룰을 거스르거나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기존 인식론적 차원의 매몰과 함께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다. 이는 지난 차원을 삭제하면서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 아닌, 관측의 시점과 사고의 양상에 따라 덧대어지고 접합하며 차원의 문을 열어 다음의 차원으로 이어지는, 시공을 입체적으로 연쇄, 감각하게 하는 식으로 발생한다. 그러므로 어느 한 지점으로 시선이 수렴되기보다는 다음의 인식을 가능케 하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자각을 발생시키는 개방의 구조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새로운 조건 값을 실험하며 관계를 조직하고 시선의 운동을 촉진한다. 그가 얘기하는 운동이란 물리적인 작용으로서의 움직임이 아닌, 상태나 감정, 정서의 이행과 전이와 같은 것이다. 작가는 <<진심으로 이동하라>>(2007,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보다 공간 적인 차원에서 연상과 이행의 관계를 조직한다. 이를테면, 성상과 같이 우뚝 선 채 얼굴의 그림자 속으로 육면체의 흔적을 지닌 인물상은 벽으로부터 튀어나와 공간의 안쪽으로 일부 연장된 냉장고의 한 면 (<사랑해>, 2007) 과 서로 마주하고 있다. 벽으로부터 나선 반입체적[1] 형상과 그를 향해 선 몸이라는 사실 외에 그 둘 사이의 긴밀함을 입증할 만한 명시적 단서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개체가 공간을 차지하는 방식, 즉 위치와 동세는 전시적 환경의 맥락 아래 모종의 링크를 형성해 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객은 눈앞의 입체와 평면을 단순히 연결 짓는 것만으로는 그 문맥을 성공적으로 구성해 내기 어렵다. 이제 그들은 전시의 시공간적 서사를 완성하는 행위자로서 시각적 공간감과 상상의 논리를 작동시켜 마주 보는 두 항 사이 여백을 채우는 모종의 리듬-시간을 발견, 추적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리듬을 따라 움직이는 시선, 혹은 시선의 움직임을 통해 생성되는 리듬은 세 개의 두상으로 구성된 작업 <델러 혼 데이니> (2007)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다른 안면을 지닌 하나의 몰드로부터 빚어진 두상들은 동일한 원형에서 탄생하여 복수의 이미지로 분열함으로 열린 형상, 고정될 수 없는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리드미컬한 시공의 차원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렇게 공간적으로 분절된 형상이 촉발하던 연쇄의 리듬은 때로는 군집의 형식으로, 때로는 하나의 형상에 집적되어 멈춰 선 시간에 잠재된 운동성과 리듬을 촉발한다.[2]



<<점, 선, 면을 제거하라>>(2014,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김인배는 신전과 같은 공간을 연출하고, 눈 없는 얼굴의 조각들을 배치한다. 여기서 작가는 다층적 서사가 가능한 공간을 상상하는데, 점, 선, 면과 같은 최소 단위로의 축소와 연장을 통해 기존의 조형적 규범과 관념에 대해 반문하고 역동적 사유의 가능성을 확보한다. 이때부터 더 이상 감각은 외부의 표피적 이미지가 아닌 형상의 단위, 물질성, 존재의 양식과 같은 조형적 원리의 내부에서 기인하기 시작한다. 그러한 면에서 근래의 전시인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2020, 페리지갤러리)에서는 구체적 형상을 완전히 내려놓은 채 서로 유기적으로 연장, 확장하는 단위, 특히 ‘선’을 전시장에 분산 배치한다. 작가는 <극중극> (2020)에서 선의 구성 요소를 분리하여 공간에 가로지르듯 설치함으로 공간 속 입체적으로 존재하는 선을 평면 위에 그어진 대상과 같은 존재감으로 부각하는 동시에 그 자체로 관찰당해야만 하는 대상-공간으로 전환시킨다. 또한 작은 사각의 평면 위에 얇은 선들이 빼곡히 그려진 선형의 재료들을 다발로 세워놓은 <선이 되려는 선>(2020)에서는 그 선의 궤적을 따르는 시선의 끝에서 공간을 가로지르는 운동감을 마주하게 한다. 한편 <멀리서 그린 그림>(2020)은 길고 연약한 도구의 끝에 연필을 연결하여 마치 중심을 잡듯 드로잉을 함으로써 손에 쥔 선형의 도구가 지닌 물성 그 자체를 재현의 대상으로 치환해 버린다. 허공을 배경으로 공간적 대상이 되어버린 선-조각, 운동의 감각으로 전환된 선의 궤적, 손끝의 감각으로 재현된 선재의 물성과 같이 김인배는 표피적 형상이나 부피, 무게와 질량과 같은 물질적 존재 양식을 의도적으로 뒤흔든다. 이제 위치와 시선을 달리하며 마주하는 장면과 그것들의 연결망 안에서 대상과의 물리적, 그리고 심리적 거리는 변화, 발전하며, 연속적인 시선의 변화를 유발하고, 단단하다고 인식했던 공간은 마치 접히거나 휘어지며 새로운 인식의 차원으로 관객을 이끈다.



김인배의 작업을 보는 이는 일관된 논리와 인과로 택하기보다는 스스로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창조하는 관찰자적 시점에서 임해야 한다. 물리적 간격을 두고 떨어진 대상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것이 놓인 공간과의 관계 안에서 관객은 이들 사이의 연관을 밝히기 위해 독립된 유닛 사이를 거닐고, 이를 연결하며, 다시 또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인식의 시각을 획득해야만 한다. 관찰과 사유를 통한 상상은 가능하되, 더 이상 시감각에 기댄 정보, 그 표면의 이미지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서 파편적으로 맞닥뜨린 장면들, 그 부분들의 총합은 어쩌면 시각적 외양보다 더 넓은 전체, 존재의 새로운 양식을 파악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초창기 작가가 사용한 ‘차원’이나 ‘경계’, ‘접촉’과 같은 표현은 일종의 언어적 외피로써 이해를 돕기 위한 매개로 사용되었을 뿐, 그것들은 언제나 ‘경계’를 허물고 ‘움직임’을 발생하며 형상의 내외부로 잠재하는 시간성과 운동성, 공간성을 발견해 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것은 동일하다. 김인배는 조각의 정지된 상태와 그 이미지 너머로 향하는 운동성의 관계를 발견하리라는 믿음 아래 작업의 견고한 형식을 둘러싼 (비)물리적 환경 조건까지 포섭하며 기존 인식의 체계에 질문을 해왔다. 일반적인 여타의 작업과 전시가 고정된 형식을 통해 주어진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그의 작업은 불확정의 임시적 상태를 허가하거나 오히려 환대한다. 더 정확히는 그의 조각은 시각적으로 구현된 고정적 현상이라기보다는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역동적으로 발견되는 가능성을 담지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차원의 경계면에 존재하는 것이거나, 혹은 새롭게 차원을 가설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김인배는 이미 존재해 온 양상(being)을 확정 이전의 상태(becoming)로 되돌려 남은 다른 가능성의 여지를 살피기를 요구한다. 고정된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인식하는 시간은 지속이라는 형식으로 계속해서 발견될 뿐이다.



[1] <사랑해>에서 냉장고의 형상은 벽의 한쪽이 밀리듯 들어가고, 반대쪽으로는 밀려서 연장하듯 형성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반입체적’이라 표현은 ‘벽’이라는 공간의 물리적 구조와 ‘입체’ 조각이라는 개별 오브젝트의 중간 상태에 걸쳐 있는 해당 작업의 존재 방식을 얘기하는 것이다.

[2] 김인배는 <<요동치는 정각에 만나요>>(2011,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여러 개체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형식을 취하거나, 한 순간에 동시에 취할 수 없는 모션을 하나의 형태에 섞어냄으로 멈춰선 조각에 보다 리드미컬한 운동감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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