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히 요동치는 장소에서





구나연





김인배의 신작 ‘개수’(2017)는 세계를 기능적으로 측정하는 기호와 한계에 불현 듯 끼어들어,대상의 인식을 신체의 원초적 영역인 ‘덩어리’로 바꾼다. 원래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거대한 두상과 알 수 없는 두 개의 둥근 물체, 그리고 유난히 작은 발은  어떤 외양의 유사성도 없이 각기떨어져 있지만, 보이지 않는 구축을 통해 서로 강력히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모두 다른 객체이면서도 모두 같은 주체이다. 자아와 타아가 구별되지 않는 이러한 상태는 수리적 단위를 스스로 파기하며 일체 혹은 객체의 모호한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김인배의 작업을 가로지르는 이러한 긴장들은 명료한 틀로 규정될 수 없는 세계 인식의 자율성과 관련된다. 신체는 경험의 매개이자 질료로서 외부의 대상을 우리 안에 끌어들인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개수의 연산이나 시선의 제한과 같이 일정한 형식을 필요로 한다. 개수는 무한한 수열에서 선택된 작은 범위이며, 시선 역시 좁은 시야 안에 무한한 세계의 찰나를 선택하거나 접촉한다. 김인배는 이와 같이 규정된 세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인식의 논리에 의문을제기한다. 그의 작업은 신체의 자의적인 배치와 구축을 통한 감각의 종합으로 세계를 재획득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얼굴의 자리

자신의 눈으로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 원초적 결여는 두 개의 눈으로 타인을 응시하는, 또 그 지점에 스스로를 투영하는 경험으로 대치된다. 특히 얼굴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결핍의 시작이면서, 낯선 신체의 익명에 대한 추론의 출발점이다. 그것은 우리를 텍스트의자리로 옮겨 놓는다. 그러나 김인배의 작업은 얼굴이 없거나,  ‘얼굴의 자리’ 만이 있다. 이것은관례적인 도상의 관념으로 유혹하는 텍스트에 관한 그의 의심을 드러낸다.
얼굴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내부로부터 떠올라 표면을 기꺼이 관통하는 감각의 궤적이 자리한다. ‘델러 혼 데이니’(Deller hon Dainy)에서 얼굴의 자리는 하나의 타불라 라사(tabula rasa)라고 할 수 있는데, 세 개의 두상은 세계의 틀이 제안한 삶의 경로를 비워낸 상태이자, 예측불가능한 주관의 에너지로 채워질 장소이다. 이는 그의 초기작이 드로잉과 조각의 상태를 동시에 지닌 채, 서로 전이하는 교차 지점에 있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사랑해’(I Love You)에서 얼굴의 자리는 내부와 외부, 평면 혹은 입체, 드로잉에서 조각이라는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의 얼굴은 제로의 영토와 같이, 규범의 단층을 무력화시키는 곳이자, 낯선 체험들의 환등이비춰지는 지점이다.
Operator에서는 가늘게 동요하는 힘의 방향들이 얼굴로부터 흘러나온다. 세 개의 두상은 모두 같은 주형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혼돈의 에너지로 얽히어 가는 단단한 삼각의 지지대와 액체처럼 솟구치는 선들을 지탱하는 구심이 된다. 따라서 김인배가 얼굴을 제거하고그 자리에 실현해 가는 것은 풍만한 역학의 구조이다. ‘조립’(Assembly)에서는 급기야 육중하고 예리한 검은 덩어리가 머리를 부수며 뚫고 나온다.  인식의 약호화된 틀에 대한 이 같은 거부는 부리와도 같고 또 무기처럼 보이기도 하는 형상의 어두운 외피와 그 위에 남은 흔적의 시간들로 환원한다. 그리고  ‘무거운 빛은 가볍다’(Heavy Light is Light)에 이르러, 두상은 육중한촉각과 힘의 과정이 그대로 응집된 금빛의 육체가 된다. 어떠한 매개물도 거치지 않고 작가의신체와 매체가 직접 맞닿아 이루어낸 움직임의 지표들은 두상의 일루젼을 진동시키는 투명함을 갖는 것이다.


투명성

김인배의 작업에서 투명성은 먼저 조각이라는 장르가 지닌 통사(通史)를 시간과 운동의 개념으로 바꾼다. 그 중에서 ‘시간’에 대한 관심은 2007년에 열린 그의 개인전 <진심으로 이동하라(move in earnest)>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시계의 틀을 교란시키고, 진자 운동으로 시간의 추상성에 접근한 작업들은 형상 없이 우리를 가두는 규칙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구체적인 기저를 알지 못할 때, 그에 접근하기 위한하나의 방법론으로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시간의 원칙을 희롱한 뒤, 완전히 다른 시간을설계하는 것이다.
2014년 개인전 <점 선 면을 제거하라>에 등장한 ‘조립되지 않은 시계’(Unassembled Clock)에서 2차원의 평면 위를 돌아가는 반복적 시간 같은 것은 없다. 정연한 단위도 없고, 수의 시작과끝도 사라진 이 시계는 무한히 변화하는 시간을 제안한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같은 시공에 있을 수 없음에도, 정작 시간과 공간의 진리는 알지 못한 채, 세계를 잠정적인 합리의 계통으로다듬는다. 김인배의 시간은 이 합리적 시공의 파기이자, 그가 시간이라고 느낀 것들에 대한 분방한 측량이다. 나아가 <점 선 면을 제거하라>는 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시간의 제단과 같다. 이 전시는 점, 선, 면이라는 수리적 세계로부터 벗어나, 영겁 속의 고분과 같은 시간의 지평으로 안내한다. 이 곳의 시간은 하나의 사건과 특정한 한때의 단위가 중첩되어 만들어낸 통속의 것이 아니다. ‘조립되지 않은 시계’와 같이 특정 차원을 넘어 해체된 시간, ‘섬광’의 구가 된손처럼 미완으로 존재하며 결코 온전히 채워질 수 없는 투명한 시간이다.  
이렇게 분절 불가능한 시간은 모든 움직임을 순간으로 응집하는 동시에, 신체의 무수한 감각의 모듈로 순간을 펼쳐 놓는다. ‘요동치는 정각에 만나요’는 ‘요동치는’과 ‘정각’의 역설이 말하듯, 움직임의 순간과 지속이 동시에 투영된 일종의 무브망(mouvement)이다. 그는 “정지는 요동을 의외의 방향으로 심화시키고 순서는 요동들의 접점에서 폭발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사실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인데 움직이지 않게 만들려는 자들의 논리가 이를 초자연으로 인식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이 격렬한 행동의 과정은 신체의 움직임에 대한 서사의 플롯 없이 육안으로 잡아낼 수 없는 투명한 힘들의 요동에 대한 구현이다. 결국 이 종합적이고도 파편적인운동의 상태는 그가 제기하는 시간 안에서 가능하다.


신체라는 장소

김인배의 작업에서 신체는 결코 온전한 채로 존재하는 일이 없다. 이는 그의 신체가 그의 눈으로 바라 본 타인의 육체가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바라 본 그 자신의 육체이기 때문이다. 시선이 지닌 결핍과 같이, 자신의 신체는 완전한 총체로 체험될 수 없으며, 감각의 집중과 그 이동사이에서 몸은 늘 변화하는 유기체로 각기 부유한다. 예컨대 Disco of the right angle에서 절단된 신체의 부분들은 어떠한 행위를 할 때 분화되고, 집중되는 인식적 전환이 드러난 상태이다. 그의 신체는 스스로의 몸이 경험한 감각의 통로이면서도, 그 총체로는 자신을 인식할 수 없는한계와 관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체의 분열이나 미끄러짐과 같은 욕망의 숙명론과 다르다. 오히려 김인배의신체는 인식의 불완전함을 더욱 해체하고, 분류하며, 심화하여, 전혀 다른 입장으로 결합되는일종의 거대한 장소이다. 그는 ‘정수’를 표현할 수단은 없다는 것, 결론에 도달하려는 사고 구조가 지닌 모순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신체라는 텍스트의 의미로 규정되곤 하는 관행적 사고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불편함과 더불어 풍요롭고 자유로운 표현의 구조를 찾아 나서는 일이다.
따라서 ‘겐다로크’(Gendarloake)나 ‘핀 휴’(Pin Hue) 등에서 얼핏 고전적으로 보이는 신체 조각이 관념적 추상의 정점과 극단적으로 결합되며 변이된 상태는 이질적 형식의 부드러운 공존이 아닌, 이형(異形)의 관념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장소로 기능한다. 오히려 그의 신체는 표면에 그대로 드러난 촉각의 해방과 보이지 않는 투명한 긴장의 결합을 통한 생명력의 기류를 지니고 있다. 이는 그의 신체가 조각의 역사적 외형을 버리고 끊임없이 포착되고 갱신되는 경험의 층위들을 그대로 투사하기 때문이며, 그가 계획과 실행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선제의 실루엣이나 우레탄 폼을 이용하여 작가의 행위와 실시간으로 밀착된 형태에 도달하려는 것과도 관련된다. 신체 위에 드러난 촉각은 시간이라는 힘의 작용과 함께 이루어지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즉 움직임이 지닌 잡힐 수 없는 순간의 체현과 표면의 촉감이 간직한 작가의 움직임은 신체위에서 빈번히 교차하며 존재와 시간을 보증한다.  
‘빛’(Light)은 푹신한 바닥에 머리와 팔 없이 누워 있는 신체 위로 예리한 추가 매달려 있다. 진자 운동을 멈춘 것 같은 날카로운 추의 끝은 그 아래 놓인 신체의 가슴을 향해 떨어질 듯 위태롭다. 형별의 긴박함을 지닌 이것은 얼핏 죽음의 메타포로도 읽히는데, 반면 이 불안한 신체의무게로 푹신하게 들어간 부드러운 바닥은 기이한 안식의 상태를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머리를 돌려 스스로의 눈으로 자신의 신체를 온전하게 볼 수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상태일지 모른다. 우리가 그의 작업 앞에서 직면하게 되는 것은 합리로는 접근할 수 없는 삶의 어떤 가능성들에 관한 실험이며, 눈을 감고 낯선 길을 걸을 때 불현 듯 마주하게 되는 정교한 각성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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